곶감과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을 통해 장인 정신을 얘기했던 윤오영 수필가가 생각나 집어든 책.
생각하며 읽어가야 하는 격이 느껴지는 수필집이었다.
예전에 어느 호강하는 대신이 달밤에 시골 산모퉁이를 지나다가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늙은 부부가 젊은 며느리 내외와 어린 손주를 놓고 재롱을 보며 웃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단란한 모습을 보고 그 행복이 부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오막살이 생활의 행복이 대신의 부귀보다 더하지 아니한가.
미는 균형과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이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미는 비참하게 깨어진다. 생활도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따뜻한 안정감과 오붓한 행복감을 느낀다. 균형을 잃은 생활은 부조리하고 살벌하다. 현대인의 불행은 이 생활의 부조리와 불균형에 있는 것이다.
파멸 직전의 향락, 앞을 못 내다보는 찰나의 행복의 추구, 현대 생활의 불행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난이 곧 불행이 아니다. 고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은 것이 불행이다.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의 생활에서 온다. 균형과 조화는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오고 행복은 이 마음의 여유에서 이루어진다.
- 생활과 행복 중에서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柿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 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 곶감과 수필 중에서